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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블로그에서는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의 인생과 업적에 관한 10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다룹니다. 예술 사기 시도에서부터 그의 유명한 작품 피에타와 다비드에 이르기까지, 미켈란젤로의 숨겨진 이야기와 그의 예술 세계를 깊이 있게 탐구해보세요.  미켈란젤로에 관한 10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정리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조각품 위조 시도 후 유명해짐

     

    미켈란젤로의 예술 사기 시도에 대한 이야기에는 흥미로운 배경이 있습니다. 1496년, 당시 21세였던 미켈란젤로는 "잠자는 큐피드"라는 제목의 조각상을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고대 로마의 조각품처럼 보이도록 특수 처리를 통해 인위적으로 고대화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눈여겨본 로렌조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Lorenzo di Pierfrancesco de' Medici)의 제안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전해집니다. 이 작품은 현존하지 않은 작품이 되었습니다.

     

    • 큐피드 조각상은 미켈란젤로가 고대 예술품처럼 보이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카디널 리아리오(Cardinal Raffaele Riario)에게 판매되었습니다. 처음에 이 조각상을 진짜 고대 작품으로 믿고 구입했지만, 이후 사기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기술에 깊은 인상을 받은 리아리오는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초대했습니다.
    • 이 사건은 미켈란젤로의 커리어에 전환점이 되었으며, 로마에서 그는 피에타를 포함한 여러 걸작을 조각하며 명성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피에타는 그의 초기 걸작으로, 미켈란젤로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이 일화는 미켈란젤로가 단순한 예술가가 아닌, 시대를 초월한 창의성과 재능을 가진 예술가로 인정받게 된 중요한 순간 중 하나입니다.

    리아리오(출처: 교회 문장학)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그가 서명한 유일한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은 1498년에서 1499년 사이에 제작된 대리석 조각으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의 시신을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피에타는 미켈란젤로의 초기 걸작 중 하나로,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 유일하게 그의 서명이 새겨진 작품, 피에타

     

    미켈란젤로가 이 작품에 서명하게 된 이유는 당시 피에타(이탈리아어로 "연민"이라는 의미가 있음)가 다른 조각가의 작품으로 오인되었기 때문입니다. 일설에 따르면 이 작품이 밀라노의 크리스토포로 솔라리가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격분하여, 한밤중에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가서 자신의 이름을 성모 마리아의 가슴을 가로지르는 띠에 새겼습니다. 그가 새긴 문구는 "MICHAELA[N]GELUS BONAROTUS FLORENTIN[US] FACIEBA[T]"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피렌체인, 이 작품을 만들었다"는 의미입니다.

     

    피에타(좌)와 미켈란젤로가 새긴 문구(우)

    ▷후회의 감정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이름을 작품에 새긴 것을 나중에 후회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를 자신의 자부심의 발로로 여겼으며, 이 사건 이후로는 다시는 작품에 서명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일화는 미켈란젤로가 예술가로서 자신의 명예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줍니다.

     

    피에타의 예술적 가치

    피에타는 미켈란젤로의 조각 기술과 예술적 감각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깊이 있는 표현으로 담아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현재 바티칸 시티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위치해 있으며,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작품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3.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의 불화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불화는 르네상스 시기의 예술적 경쟁과 개인적인 차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피렌체에서 활동했으며, 각기 다른 예술적 철학과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켈란젤로(좌)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우)

    예술적 접근 방식의 차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예술을 통해 자연의 관찰과 과학적 탐구를 결합하려는 성향이 강했습니다. 그는 인체 해부학, 빛과 그림자, 그리고 자연의 정확한 묘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의 작품은 세밀한 관찰과 과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인체의 이상화된 형태와 강력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내면적 고뇌와 신체의 아름다움을 조각과 회화를 통해 강렬하게 묘사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대담하고 역동적인 구성과 강한 감정 표현으로 유명합니다. 이 표는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예술적 접근 방식과 철학적 차이점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이들의 차이는 르네상스 예술의 다양한 측면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항목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생존 기간 1475년 3월 6일 ~ 1564년 2월 18일(89세) 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62새)
    예술적 접근 방식 인체의 이상화와 감정을 강렬하게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둠 자연의 정확한 묘사와 과학적 관찰을 중시함
    주요 작업 분야 조각, 회화, 건축 회화, 해부학, 기계 공학, 수학
    대표 작품 다비드, 피에타,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비트루비안 인간
    예술적 철학 인간의 내면적 고뇌와 신체의 역동성을 강조함 인간과 자연을 과학적, 수학적 방법으로 이해하고 표현함
    성격 및 성향 강한 의지와 독립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부심이 강함 다재다능하고 호기심이 많으며, 예술 외에도 다양한 과학적 분야에 관심을 가짐
    학문적 관심 인체 해부학, 신화와 종교적 주제 해부학, 기하학, 물리학, 생물학, 천문학 등 다양한 과학 분야
    예술적 기법 대리석 조각의 섬세한 디테일과 드라마틱한 구성을 통해 감정을 전달 스푸마토(연기처럼 부드럽게 흐릿한 경계) 기법을 통해 사실적이고 부드러운 표현을 중시함
    예술의 목적 인간의 숭고함과 신성한 주제를 통해 감정적 영향을 주고자 함 자연의 미와 조화, 그리고 과학적 진리를 예술을 통해 탐구하고자 함
    영향 후대의 조각가와 화가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쳐 르네상스의 핵심 인물로 남음 르네상스의 모든 예술 분야에 걸쳐 영향을 미친 다재다능한 인물로, 예술가뿐만 아니라 과학자에게도 영감을 줌

     

    경쟁과 갈등

     

    이 두 거장의 예술적 차이와 강한 개성은 자연스럽게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피렌체에서 이들은 서로 다른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자주 경쟁하게 되었고, 이는 갈등을 유발했습니다. 특히 두 사람이 공공연하게 논쟁을 벌인 사건으로, 피렌체의 한 광장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단테의 작품에 대한 해석을 요구받았을 때, 미켈란젤로에게 대신 설명하라고 제안한 일이 있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제안을 무례하다고 느꼈고, 다 빈치를 모욕하며 떠난 것으로 전해집니다.

     

    ▷ 영향과 유산

     

    이들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서로의 예술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고, 레오나르도 역시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존중했습니다. 이들의 경쟁은 결국 르네상스 예술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그들이 남긴 작품들은 오늘날까지도 예술적 기준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불화는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강한 성격과 그들이 처한 예술적 환경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르네상스 시기의 복잡한 예술적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4. 버려진 대리석을 활용한 대작, 다비드상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조각상은 르네상스 예술의 대표적인 걸작 중 하나로, 이 조각상은 단순히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그 제작 과정에서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조각상에서 다비드는 성경에 등장하는 고대 이스라엘의 인물 다윗 왕을 묘사한 것입니다. 다윗은 성경의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제2대 왕으로 등장하며, 골리앗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영웅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다윗을 조각할 때, 그가 골리앗과 싸우기 직전의 순간을 포착했습니다. 조각상의 다비드는 젊고 강인하며,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이 조각상은 피렌체의 시민 자유와 공화국의 이상을 상징하며, 미켈란젤로는 이를 통해 인간의 이상적인 신체미와 힘, 그리고 정신적 결단력을 표현했습니다.

     

    다비드 조각상(출처: 아카데미아.org)

    대리석의 역사와 도전

     

    다비드 조각에 사용된 대리석은 원래 피렌체 대성당의 외벽에 세울 조각상 시리즈 중 하나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습니다. 이 대리석은 1464년에 조각가 아고스티노 디 두치오(Agostino di Duccio)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나, 작업 도중 중단되었습니다. 이후 이 대리석은 약 40년 동안 사용되지 않고 방치된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 대리석 블록은 "기간테(Gigante)"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 크기와 더불어 대리석 내부에 여러 결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결함으로 인해 다른 조각가들은 이 대리석을 사용하는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 "기간테(Gigante)"는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다비드 조각상에 사용된 대리석 블록에 붙여진 별명으로 이탈리아어로 "거인"을 의미합니다.

     

    미켈란젤로의 접근 방식

     

    1501년, 미켈란젤로는 26세의 나이로 이 대리석을 사용해 새로운 조각을 제작할 기회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 대리석을 거절한 이전의 조각가들과 달리, 이 블록 안에 이미 완성된 조각상이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대리석 블록을 면밀히 관찰하고, 그 안에 있는 형태를 "해방"시키기 위해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대리석의 결을 따라 조심스럽게 작업하며, 다비드의 완벽한 형태를 조각해냈습니다.

     

    작품의 완성

     

    미켈란젤로는 1501년부터 1504년까지 약 3년에 걸쳐 다비드를 완성했습니다. 이 조각상은 높이가 약 5.17미터에 달하며, 성경에서 골리앗을 무찌르기 전의 다비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피렌체 공화국의 자유와 시민의 권리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여겨졌으며, 조각의 완벽함과 미켈란젤로의 기술적 능력으로 인해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습니다. 다비드는 피렌체 대성당의 외벽이 아닌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 세워졌으며, 후에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겨져 현재까지 그곳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미켈란젤로가 단순한 조각가가 아닌, 대리석 블록 속에 이미 존재하는 형태를 "발견"할 수 있는 천재적인 시각을 가진 예술가임을 잘 보여줍니다.


    5. 예술 비판에 관해 복수심이 강했던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와 교황의 의전관 비아지오 다 체세나(Biagio da Cesena) 사이의 일화는 르네상스 예술의 역사에서 유명한 에피소드 중 하나입니다. 이 이야기는 미켈란젤로의 복수심과 예술적 자부심을 잘 보여줍니다.

     

    최후의 심판(원 내는 이 블로그와 관련된 내용을 포함)

     

    배경

     

    1541년, 미켈란젤로는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제단 뒤 벽에 최후의 심판을 완성했습니다. 이 작품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을 묘사하며,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는 인류의 운명을 표현한 대작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에서 많은 인물들을 나체로 묘사했는데, 이는 당시 예술에서 흔히 사용되던 표현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나체 표현은 일부 종교인들과 보수적인 인물들에게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비아지오 다 체세나의 비판

     

    당시 교황 바오로 3세의 의전관이었던 비아지오 다 체세나는 이 작품을 보고 "이런 그림은 경건한 장소가 아닌 술집이나 공공 화장실에나 어울린다"며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미켈란젤로의 나체 묘사가 성당에 부적절하다고 생각했고, 이를 공개적으로 비난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대응

     

    미켈란젤로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복수를 결심했습니다. 그는 최후의 심판의 우측 하단부 지옥 장면에서 비아지오 다 체세나의 얼굴을 그리스 신화에서 지옥의 심판관으로 등장하는 미노스(Minos)로 묘사했습니다. 미노스는 나체로 그려졌고, 그의 얼굴에는 큰 당나귀 귀가 달려 있었으며, 그의 몸을 감고 있는 뱀이 그의 생식기를 물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이로써 미켈란젤로는 다 체세나를 조롱하고 그를 지옥의 상징적 존재로 묘사했습니다.

     

    최후의 심판의 미노스 형상과 바티칸 시스타나 성당(출처: 연합뉴스)

     

    미노스(Minos)는 그리스 신화에서 크레타섬의 왕으로, 크레타의 강력한 왕이면서 죽은 자의 영혼을 심판하는 지옥의 심판관입니다. 미노스는 사후에 저승에서 죽은 자의 영혼을 심판하여 천국으로 갈지, 지옥으로 갈지를 결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특히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에서 미노스는 지옥의 입구에서 영혼들을 심판하는 역할을 맡으며, 영혼의 죄의 무게에 따라 지옥의 특정 층으로 그들을 보내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는 꼬리를 감아서 영혼이 지옥의 몇 번째 층으로 내려가야 하는지를 결정합니다.

     

    비아지오 다 체세나의 반응

     

    비아지오 다 체세나는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교황에게 항의했으나, 교황 바오로 3세는 이 사건에 대해 "나의 권한은 천국과 지옥에 미치지 못한다"는 농담을 하며 미켈란젤로의 행동을 묵인했습니다. 이로 인해 비아지오 다 체세나는 작품에 영구히 남게 되었고, 후세 사람들에게 미켈란젤로의 기질을 잘 보여주는 일화로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예술적 자유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그의 작품에 대한 비판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최후의 심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 보존되어 있으며, 이 일화와 함께 미켈란젤로의 독창성과 개인적 기질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6. 최후의 심판에 포함된 자화상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최후의 심판에서 자신의 자화상을 포함시킨 것은 매우 개인적이고 상징적인 요소로 해석됩니다. 이 자화상은 성 바르톨로메오가 들고 있는 벗겨진 껍질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성 바르톨로메오와 자화상

     

    최후의 심판은 1536년부터 1541년까지 그려진 대작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 바르톨로메오는 전통적으로 순교 당시 살아있는 채로 껍질이 벗겨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켈란젤로는 이를 작품에서 매우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성 바르톨로메오는 오른손에 칼을 들고 왼손에 자신의 벗겨진 피부를 들고 있습니다. 이 벗겨진 피부는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으로, 얼굴의 특징이 미켈란젤로 자신의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아르메니아에서 선교하다가 순교했는데, 산채로 살가죽을 벗기는 형벌을 받았다. 최후의 만찬에서 바르톨로메오(성 바돌로매)는 그림의 오른쪽 끝에서 세 번째 위치에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가까운 제자들 가운데 한 명으로, 예수님께 몸을 기울이며 그림에서 중앙에 가까운 위치에 서 있습니다. 성 바르톨로메오는 그의 오른손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왼손은 가슴에 대고 있는 자세로 묘사됩니다

     

    최후의 심판에서 바르톨로메오(좌)와 최후의 만찬에서 바르톨로메오(우)

    자화상의 의미

     

    미켈란젤로가 이 자화상을 포함시킨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 일부 학자들은 그가 자신의 창작 과정에서 느낀 고통과 피로감을 표현한 것으로 보고,
    • 또 다른 해석으로는 그가 인생의 말년에 자신이 죽음에 다가가고 있음을 인식하고 이를 반영한 것이라고 봅니다.
    • 또한,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예술적 고뇌와 인간적인 약함을 통해 심오한 자아 성찰을 담았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 자화상은 단순한 예술적 요소를 넘어, 미켈란젤로의 개인적인 감정과 그의 삶에 대한 철학을 표현한 중요한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이는 그의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와 감상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는 부분입니다.


    7. 시인,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는 주로 조각가, 화가, 건축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또한 상당히 많은 시를 남긴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그의 인생 전반에 걸쳐 300편 이상의 시를 썼으며, 이들 중 다수는 그의 친구 비토리아 콜론나(Vittoria Colonna)에게 바쳐졌습니다. 콜론나는 이탈리아의 귀족이자 시인으로, 미켈란젤로와 깊은 정신적, 예술적 유대감을 공유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시와 비토리아 콜론나

     

    미켈란젤로의 시들은 종교적 성찰, 인간의 고통, 사랑, 그리고 예술에 대한 고뇌를 다루고 있습니다. 비토리아 콜론나에게 바쳐진 시들에서는 그와 콜론나의 영적인 교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콜론나는 가톨릭 개혁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미켈란젤로는 그녀의 영향으로 신앙심을 더욱 깊게 되었습니다. 그의 시에서는 이러한 종교적 주제가 자주 등장하며, 특히 콜론나에게 바쳐진 시들은 깊은 경외와 존경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비토리아 콜로나 (출처: 브루클린 박물관(좌, 미켈란젤로 작품으로 알려짐), Digital History and Culture Heritage(우)

    ※ 비토리아 콜론나(Vittoria Colonna, 1490-1547)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시인이자 귀족 여성으로, 문학과 종교 개혁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녀는 로마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페스카라 후작 페르난도 다발로스와 결혼했으며, 남편의 사망 이후 깊은 슬픔과 종교적 성찰이 담긴 시를 남겼습니다. 콜론나는 가톨릭 교회의 개혁을 지지하고, 루터교와 가톨릭의 중재를 시도한 개혁 운동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미켈란젤로와 깊은 우정을 나누며, 그에게 영감을 주는 인물로도 유명했습니다. 그녀는 소네트와 시편을 통해 깊은 감성과 신앙심을 표현하며, 당대의 중요한 여성 시인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시의 예시

     

    미켈란젤로의 시 중 한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Sonetto a Vittoria Colonna" (비토리아 콜론나에게 바치는 소네트)

    마치 눈부신 태양이 드높은 하늘에 서 있을 때
    지혜로운 그 빛이 모든 어둠을 쫓아내듯이
    당신의 빛나는 영혼이 내 마음을 밝혀줍니다.

     

    이 시에서는 콜론나를 태양에 비유하며 그녀의 영적인 빛이 자신을 어떻게 인도하고 있는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시 저서

     

    미켈란젤로의 시는 그가 생전에 출판하지 않았지만, 그의 죽음 이후 여러 저서로 출판되었습니다. 몇 가지 중요한 저서로는 다음이 있습니다:

    • "Rime di Michelangelo Buonarroti"
      미켈란젤로의 시를 처음으로 모은 책으로, 1623년에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그의 다양한 시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특히 콜론나에게 바친 시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 "The Complete Poems of Michelangelo" (미켈란젤로의 전집)
      현대 영어 번역본으로, 존 프리데릭 노크스(John Frederick Nims)가 번역한 판본이 유명합니다. 이 책은 미켈란젤로의 시를 영어로 접할 수 있는 좋은 자료입니다.
    • "Michelangelo: Poems and Letters"
      앤서니 모턴(Anthony Mortimer)이 번역한 이 책은 미켈란젤로의 시와 편지를 포함하고 있어, 그의 내면 세계와 인간 관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미켈란젤로의 시집들

    미켈란젤로는 조각과 회화에서만이 아니라 문학에서도 그의 천재성을 발휘한 예술가였습니다. 그의 시는 그가 겪었던 개인적 고뇌와 영적인 여정을 반영하며, 특히 비토리아 콜론나와의 관계에서 이러한 감정이 잘 드러납니다. 그의 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그의 예술적 유산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줍니다.


    8. 부유한 예술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예술적 재능뿐만 아니라 뛰어난 경제적 감각으로도 유명했습니다. 그는 조각, 회화, 건축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당시 예술가로서는 이례적인 수준의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의 수익원은 주로 대규모 예술 프로젝트, 교회와 왕실로부터의 후원, 그리고 전략적인 부동산 투자에서 나왔습니다.

     

    작품 활동과 수익

     

    미켈란젤로는 다비드상천지창조 등 걸작을 통해 막대한 수입을 올렸습니다. 당시 그는 교황 율리우스 2세, 메디치 가문 등 영향력 있는 후원자들과의 계약을 통해 작품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높은 가격에 팔렸고, 그가 제공한 예술적 기여는 후원자들로부터 풍부한 보상을 받았습니다.

     

    교황 율리우스 2세와 천지창조

      부동산 투자

     

    미켈란젤로는 작품 활동으로 얻은 수익을 부동산에 투자하여 재산을 더욱 증대시켰습니다. 그는 피렌체와 로마에 여러 부동산을 소유했으며, 이러한 자산들은 그의 재정적 안정성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그의 신중한 투자 결정은 부를 축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사망 당시의 유산

     

    미켈란젤로는 1564년 88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유산은 약 50,000 플로린에 달했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약 5,000만 달러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입니다. 이 금액은 당시 예술가로서의 경제적 성공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입니다. 미켈란젤로의 재산은 주로 그의 조카와 가족에게 상속되었으며, 이는 그의 경제적 안목과 성공적인 예술 경력을 잘 나타냅니다.

     

    미켈란젤로는 예술가로서 뿐만 아니라 부유한 사업가로서의 면모도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경제적 성공은 당시 예술가들이 어떻게 재정적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9. 89세까지 장수한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1564년에 8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이는 당시의 평균 수명을 훨씬 초과하는 나이였습니다.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일반적인 평균 수명은 30~40세 정도였으며, 전염병, 전쟁, 높은 유아 사망률, 의료 기술의 한계 등이 주된 이유였습니다. 따라서 미켈란젤로의 장수는 예외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

     

    미켈란젤로의 장수 비결

     

    • 건강한 생활 습관: 미켈란젤로는 고된 노동과 관련된 예술 활동에도 불구하고 평생 동안 건강을 유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자주 단식하고 절제된 식생활을 유지했습니다.
    • 활발한 작업 활동: 미켈란젤로는 노년까지도 왕성하게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그의 육체적 활동은 그가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예술가로서의 작업은 그의 정신적 활력을 유지하게 했으며, 이는 장수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수 있습니다.
    • 정신적 강인함: 미켈란젤로는 깊은 종교적 신념과 예술적 열정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는 그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정신적 안정감과 만족감은 신체적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당시 사회적 배경과 환경

     

    미켈란젤로는 귀족적 배경과 경제적 안정성을 바탕으로 한 안정된 생활을 누렸습니다. 또한, 그는 피렌체와 로마 같은 대도시에서 활동했는데, 이러한 도시들은 당시의 평균적인 생활 환경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나은 의료 환경과 사회적 혜택을 제공받을 수 있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장수는 그의 개인적 생활 습관, 정신적 강인함, 그리고 그가 처한 사회적, 경제적 배경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그를 당시의 다른 예술가들과 비교할 때 더욱 돋보이게 만들며, 그의 예술적 업적뿐만 아니라 그가 어떻게 자신의 삶을 살아갔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10. 생존 당시 2개의 전기가 출판된 최초의 서양 예술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생전 전기가 출판된 최초의 서양 예술가로, 이는 그의 예술적 업적이 당시 얼마나 높이 평가받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의 전기는 두 권이 출판되었으며, 이는 르네상스 시대의 문화적 맥락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됩니다.

     

    첫 번째 전기: 조르조 바사리의 "미술가 열전"

     

    1550년에 출판된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의 미술가 열전(Vite de' più eccellenti pittori, scultori, e architettori)은 미켈란젤로의 생애와 업적을 다룬 최초의 전기 중 하나입니다. 이 책은 미켈란젤로를 르네상스 예술의 정점으로 묘사하며, 그를 "신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예술가로 찬양했습니다. 바사리는 미켈란젤로를 매우 존경했으며, 그의 예술적 천재성을 높이 평가하여 그의 전기를 특별히 다루었습니다.

     

    두 번째 전기: 아스카니오 콘디비의 전기

     

    1553년에 출판된 아스카니오 콘디비(Ascanio Condivi)의 미켈란젤로 전기(Vita di Michelagnolo Buonarroti)는 미켈란젤로의 생애를 보다 개인적인 시각에서 다룬 책입니다. 콘디비는 미켈란젤로의 제자로서 그의 삶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었으며, 이 전기에서 미켈란젤로의 개인적인 면모와 예술적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했습니다. 이 책은 미켈란젤로의 직접적인 참여와 승인을 받아 출판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줄리오 보나소네가 그린 미켈란젤로 초상화(당시 72세)와 미켈란젤로 전기의 첫 페이지

    미켈란젤로의 생전 전기 출판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예술가의 전기가 살아있는 동안 출판되는 것은 그가 얼마나 영향력 있고 존경받는 인물인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또한, 이는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이미지와 명성을 관리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는 점도 시사합니다. 이러한 전기는 이후 예술가들의 전기 출판의 전례를 만들었으며,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과 문화에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전기는 그가 예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그의 작품이 당대에 어떻게 평가되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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